
저희 친정 집은 생일 날이 되어도 별로 축하 분위기를 즐길 줄 모르는 집이었고, 그래서인지 저도 남들 생일도 잘 챙겨 줄 줄도 모르고, 제 생일이 와도 무덤덤하던 사람입니다.친정 아버님은 평안도 선천 태생이신데, 오랜 동안 만주로 가 계시던 부모님을 뒤로 하고, 625 전쟁 시 국군에 자원하여 남쪽으로 단신 월남하신 분입니다.
일사 후퇴 때에 인민군 탱크가 온다는 소식에 본인이 탱크에 뛰어 올라 자폭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살리겠다고 자원하셔서 땅을 파고 기다리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탱크가 경로를 약간 수정하는 바람에 계획이 이루어지 않고 살아 나셨습니다. 이 전쟁으로 한 쪽 고막을 잃으셨고요 ..
생각해 보면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평생 기독교인들을 혐오하시던 아버지를 팔순이 거의 다 될 때 쯤 생명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살려 주신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종가의 5 대 독자로 태어 나셔서 온 친척의 사랑을 다 받으셨지만, 죽지 않고 장수하려면 부모님과 같이 살면 안된다는 점장이의 말 때문에 정작 부모님과는 얼마 같이 살지 못하고 고모님들이 키워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아버지께서 매 년 생신 날만 되면, 이북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이 나서 혼자 사라지셨다가 술이 취해서 밤 늦게 들어 오시곤 했습니다. 자연히 저는 생일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때론 좀 우울해지는 날로도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 금년 제 생일 날은 자가 격리 중인 바람에 일생에 가장 요란하고, 종일 법석을 떨며 보낸 날이었습니다
코로나에 발목이 잡혀서 한국에 들어가지 못한 동생네, 손녀들, 목장 식구들, 초원 식구들이 음식, 꽃, 케이크를 배달하고, 시간표를 짜서 화상 축하를 해주고, 폭죽 영상을 틀어주고, 축하 메시지들을 읽어주고 ...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건가 하고 너무나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 ㅎㅎ
그러면서 그 동안 가족과 목장 식구, 초원식구들 생일을 정성스레 못 챙겨 준 것이 미안해지고, 저도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 생일을 잘 기억해 주도록 노력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